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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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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작성자 임은애 작성일 2019-10-17 19:30:45

        주기도문 속에 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기도의 곳간을 여는 열쇠로 이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자원이 방치되다시피 하는 데는 지극히 익숙하다는 사실도 한 몫 하는 듯하다.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 안에 다 있다(팀 켈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 첫마디인 ‘아빠’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로서, 하나님께 청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1)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언어의 의미는 ‘상속자’라는 것이다. 상속받는다는 것은 결코 모자람이 없는 그 하나님의 부요를 내가 끌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언어는 전적인 의존을 고백하는 언어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너희의 필요함을 안다.”(마6:8,32)  하나님이 그러한 아빠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김세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2).  하나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인정되고, 하나님의 초월성3)을 인정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 거룩하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  즉 윤리적 의미는 첫째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김세윤).  루터의 말처럼,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항상 거룩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루터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을 또 다른 의미로도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세상 방방곡곡에 두루 퍼지며 크리스찬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팀 켈러).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것은 주기도문의 가장 주된 청원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그의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것은 ‘주권4)과 관련된 간구다.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팀 켈러).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는 “당신의 통치가 오소서”라는 것이다.  영생이란 영적인 삶이라는 말도 아니고 시간적으로만 길게 늘어진 영원한 삶이라는 말도 아니다.  오는 세대 즉 다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서의 삶을 말한다.  영생이란 내용적으로는 아담적 결핍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신적 부요함(=무한)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적(신적) 삶’이라고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다.  거기에는 결핍으로부터 오는 고난이 없다.  하나님의 충만하심,  곧 하나님의 무한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다(김세윤).

    하나님의 통치가 복음이다.  왜 하나님의 통치가 복음인가?  하나님께로의 귀환,  탕자의 비유로 말하면 거지가 된 아들이 부유한 아버지께로의 회복이 이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이다.  우리 인간의 아담적 숙명을 극복하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회복되어 창조주의 신적 생명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말이다.  이것이 예수의 복음이다(김세윤).

        뜻이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세 번째 간구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서 온갖 질병과 가난,  수치와 고통,  역경을 기꺼이 견디며,  주님의 거룩한 뜻이 그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알게 해 주소서.”  예수님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상 누구도 마주한 적이 없는 지독히 참담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기도문의 이 부분을 고백하셨다.  그리고 칼뱅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은 하나같이 위치,  즉 이 세 가지 기원이 초반에 배치된 사실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기도의 도입부는 모두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스로의 필요나 문젯거리가 기도를 지배하게 두면 안 된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왕이신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기를 구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염원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팀 켈러).

       오늘5)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양식 기도는 맘몬 숭배와 대립한다6).  이 문장은 “날마다 우리에게 그날 필요한 음식을 주시옵소서”라는 뜻이다.  출애굽기 16장을 근거로 하면,  우리가 매일 음식을 더 많이 거두려고 욕심 갖지 말고 그날그날 하나님께 의지해서 사는 삶의 자세를 갖추라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 삶의 자세의 내용은 근심하지 않는 태도다.  마6:22-34의 말씀 중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한다(25,28,31절).  공중의 새와 들의 꽃에서 초월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운 하나님 노릇 해주심을 배우라고 하신다(김세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 간구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  이 뜻은 마태판을 기준으로 보면(마태판이 더 원형이니까),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죄들)을 용서하겠나이다”라는 뜻이다(김세윤).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적으로 죄7)와 용서의 문제를 두고 치열한 씨름을 벌인 루터는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회개나 고백하는 것이 하찮게 여겨진다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며...복음에서 확신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꼬박꼬박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는데도 삶 가운데 확신과 기쁨이 점점 커지지 않는다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팀 켈러).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직결시켜 판단하신다.  이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스스로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대를 용서하거나 편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쓰라린 상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뿐만 아니라,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스스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큼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구하는 위선과 마주칠 따름이다(팀 켈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어거스틴은 “시험에 들지 않게”가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말한다(팀 켈러).  여기에 사용된 ‘시험’이라는 말은 유혹이라는 의미로도 쓰이고,  시험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기는 하지만 유혹하지는 않는다.  유혹은 사탄이 한다.  그러므로 ‘시험’은 유혹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유혹으로부터 막는다는 것은 곧 사탄으로부터 보호함을 뜻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마태는 여기에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주소서8)”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김세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 종말론적인 유보 상태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기도이기도 하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그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간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자녀다.  그러나 이미 받은 구원은 어디까지나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첫 열매에 불과하다.  이 첫 열매라는 그림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계속해서 사탄의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의 요구에 노출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 마지막 청원은 우리 스스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책임 있는 제자도를 서약하도록 하는 청원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의 통치에 대해 철저히 의식하게 하는 청원이다.  사탄의 엄연한 통치가 있다는 사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아직 완성을 향해서 간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오소서”라는 기도와,  “사탄으로부터 구출하소서”라는 기도를 필연적으로 하게 한다(김세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찬양에 해당하는 구절이 남았다.  어거스틴과 루터는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지나간다.  반면에 칼뱅은 “라틴어 판에 없는” 문절임을 알면서도 “여기에 두는 게 지극히 타당하므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크리스천은 결핍과 역경,  한계 따위에 깊이 들어갔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온전히 채워 주신다는 진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루터와 칼뱅은 주기도문을 대하는 크리스천이 어떠한 기도를 드리든 끝없이 갈고 다듬어 그 안에 주기도문을 새겨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롭게 간구하는 기도로 가기 전에,  루터가 했던 것처럼 하루에 두 번씩,  주기도문을 자기 식으로 바꿔 기도하는 연습은 더없이 유용한 도구다.

    주님이 이 기도문을 복수형으로 주셨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며,  힘닿는 데까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팀 켈러).

  

   주기도문의 탁월함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기도라는 데 있다.  청원과 서약을 내포하는 청원이기 때문이다9).  그래서 이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  자기의 욕심만을 만족시키면 그만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기도와 대조된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께 의지함이며,  의지하게 해달라는 청원이다.  동시에 청원을 드리는 자로서 인간적(내 쪽) 부분은 내가 하겠다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서약하는 것이다(김세윤).

  

                                           <후주>

   1) 하나님은 ‘아빠’이지만 경외받으셔야 할 분이다. 하나님을 ‘아빠’라 하는 것이 ‘친근함’을 강조한다면, ‘하늘에 계시는’이라는 말은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김세윤).

   2)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을 따라 청원으로 보아도 물론 괜찮다(김세윤).

   3) 하나님의 초월성, 즉 ‘거룩’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개념이다. 피조물과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쓴다. 피조물과 다른 존재라는 그 물리적 개념에서 이차적으로 윤리적인 의미가 도출된다(김세윤).

   4) 모든 인간고의 원인은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두고 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영적, 심리적, 문화적, 심지어 물질적인 문제들이 줄을 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팀 켈러).

   5) 마태복음의 ‘오늘’이 누가복음에는 ‘날마다’ 또는 ‘그 날에 필요한’이라는 뜻의 ‘토 카타 헤메란’이라는 문구로 되어있다.

   6) 칼뱅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언급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들을 구하라”고 강조하였다(팀 켈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반대말은 우상 숭배다. 예수는 가장 견고한 우상 숭배는 돌 조각 나무 조각에 절하는 것이 아니라, 맘모니즘 곧 물질주의라고 했다.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말은 맘모니즘(물질주의)의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가르친다(김세윤).

   7)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 누가가 이렇게 복수를 써서 ‘죄들’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크게 “죄의식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또는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옵소서”라는 것을 의미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기 위함이다(김세윤).

   8) “우리를 구출하소서”라는 기도의 의미는 누구도 영웅주의에 빠질 수 없음을 나타내준다. 즉 누구도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하고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갈 수 없음을 말한다. 오로지 하나님의 초월로서 은혜로 오시는 하나님의 힘에 힘입어 우리가 사탄을 물리칠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오심의 가장 중요한 강조는 초월로부터 은혜로 오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다(김세윤).

   9)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은 “오늘 우리의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의 청원만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에 의해 살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동시에 포함한다. 그 앞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는 청원도 마찬가지다. 이 청원은 “나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담고 있다.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나도 나에게 죄지은 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서약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소서”라고 해보았자 허구가 되는 것이다(김세윤).

 

   * 이 글은 팀 켈러의 '기도'와 김세윤의 '주기도문 강해'를 편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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