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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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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야기3
작성자 신상형 작성일 2007-01-01 04:15:15
헌금 왜 무기명으로인가?


들어가기에 전에

우선 지금까지 ‘헌금이야기1,2’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움이>, <관리자>, <근로자>, <감사한 이> 님들은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현해 주셔서 특히 감사를 드립니다. 이분들을 통해 두 가지 태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도우미>의 글은 이 글을 올린 시점과 중복되어 감안하지 못한 점 이해하십시오) 하나는 “헌금을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인지 모르겠어....”라는 심각한 자세와 “왜 이렇게 따져?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라는 가벼운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자세이든 일리가 있고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가 생각보다 신중히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잘 헤아려서 정립을 하면 신앙에도 도움이 되고 헌금생활에서도 명확한 기준을 얻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인생의 <사춘기>는 대수롭지 않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 문제를 지난 어른에게 사춘기는 그저 과거의 하찮은 사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춘기를 성공적으로 거친 소년은 그 과정을 통해 위대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것에 실패한 청년은 패망하는 인물로 전락되기도 합니다. 당사자 청소년이든 그를 보살피는 어른이든 간에 간단히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사춘기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춘기란 인생의 객관적 사고가 시작되는 특별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에서 헌금이 사춘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다루면 다룰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정황에 따라 폭발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물질문제입니다. 세상에서 돈의 사용은 한 사람을 우아하게 만들기도 하고 가장 저질의 인간으로 전락시키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헌금은 한 교인의 신앙을 품위 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저속한 기복신앙인으로 타락시키게도 만듭니다. 따라서 헌금에 대해서는 확고한 기준과 원칙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번이 헌금을 다루는 마지막 회차의 글이 될 것 같습니다(혹시 특별한 논의를 계속하고 싶으신 분이 있으시면 섭섭하시겠지만). 그래서 간단하게 댓글을 단 님들의 핵심논의를 정리하고 이에 응대한 뒤 제 얘기를 좀 길게(?) 해드리겠습니다.

1. <배움이>
감사, 선교 등의 헌금은 무기명으로 하지만, 십일조는 세금공제를 위해 기명으로 했고, 전자의 것은 “모르게 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사람을 의식하게 되었다.
<필자>
헌금의 이런 구분은 모호하며, 님의 십일조의 기명의 목적은 너무 실용적입니다.
“모르게 내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여야 할 것 같습니다.

2. <관리자>
기재사항을 정확하게 적는 것은 헌금정리를 위한 배려이다.
<필자>
헌금정리의 편의성을 헌금의 목적보다 앞세운다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3. <근로자>
국가가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간접적 재정투입의 일환으로 종교인들의 기부활동을 장려해야 한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고 하셨으므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서 세속적 영역이 존재하므로 그것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평신도를 너무 머리 아프게 (논쟁)하지 말자
<필자>
실제로 많은 종교인들이 교회 밖에서조차 기부활동을 합니다. 다만 기부활동과 헌금이 같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구절 바로 뒤에 하나님의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양자가 구별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 헌금문제는 머리가 좀 아파요. 그래도 이왕 하는 헌금, 신앙적인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4. <감사한 이>
율법도 중요하다. 복음을 중시하다보면 율법은 무시된다.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오셨다.
<필자>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만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꾸지람입니다. 그들은 율법 따로 복음(의 실천) 따로 라는 이원론을 펼쳤는데, 님의 주장은 오히려 바리새인의 이것과 같은 (이원론적 오류의) 범주에 들 수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율법이 들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들어가서
위의 사항을 고려하여 총체적으로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헌금이 무기명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저의 주장을 떠받치는 (성경적) 근거는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따라서 그 모든 것의 주인이다, 그리고 헌금은 그것의 인정이다 라는 신앙고백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주인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 만사를 우리가 경영하고 있다 해도,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모든 (경제)행위의 비용은 근본적으로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며, 우리의 헌금(특히 구약에서의 십일조)은 예배를 통해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 당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의 고백의 구체적 표현물입니다.
말하자면 삶을 이어가는 모든 것이 온통 그분의 것이어서 모든 것을 드려야 마땅하지만, 우리 삶을 위해 물질을 쓰고 어쨌든 그 일부라도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면서 이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우주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고 한 장치가 십일조(와 헌금)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다 빚쟁이며, 빚 주인인 하나님이 환불을 요구하시면 무조건 다 내어드려야 할 처지입니다. 그 십일조를 원주인인 그분께 돌려드리면서 왜 봉투에 우리 이름을 명기하여 자기 것이라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소유권을 주장합니까. 이것은 너무 몰염치한 행동이 아닐까요? “(바리새인처럼)나는 십일조를 낸다.”는 주장을 당당히 하기 위해  이름과 액수를 쓰야 한다면, 이 당당한 주장을 누구를 향해 명시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전혀 헷갈릴 분도 아니신데 말이죠.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그분은 그냥 빚 독촉만 하시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 위에 풍성한 정신과 물질을 퍼부어 주십니다. 즉 우리의 삶은 그분의 은혜로 인하여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죽는 것이 당연하고, 쫄딱 망해야 마땅할 우리의 신세가 이런 풍성함을 누리다니 사나 죽으나 기쁠 뿐이고, 이 사실의 고백의 실물표현이 바로 감사헌금입니다. 감사의 근원이 그분이므로 이것 역시 우리의 이름을 거기에 갖다붙이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감히 자기의 이름을 써 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름을 헌금봉투 위에 또렷이 쓰는 몰염치한 일은 동료교인에게도 드러내기 낯간지러운 미숙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해 궁색한 변명이 있을 수 있겠으나, 마태복음에 나오듯, 선행마저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충고를 들으면 언감생심 헌금봉투에 이름을 쓸 수 있을까요?
  요약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이고, 우리가 할 최선의 것은 감사 뿐입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이나 예수님의 상징인 교회에 대해 드리는 헌금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영적 철면피(죄송하지만)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 제가 20대에 은혜 받고 느낀 감정이었습니다. 또, 서원이나 조건을 거는 헌금을 드리는 분이 있는데, 제게는 이것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의 마음을 잡으려고 바치는 기복적 헌금은 기독교, 특히 개혁종교인 개신교회의 정신에는 맞지 않는 헌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잡아달라고 기도드리고 감사하면 안 될까요?

연말정산에 대하여
많은 근로소득자들이 연말이면 교회에 낸 각종 헌금액의 증빙서류를 국가에 낸 소득을 탕감받기 위해  만들어 갑니다. 저는 이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오도를 이미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살펴보십시다.
  연말 정산은 국가나 사회에 낸 세금이나 기여금 중에서 근로자가 이중으로 내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고, 그것을 제거하거나 줄여주는 것이 소득세 공제 및 환급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마땅히 내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국가가 돌려주지 않습니다. 또 근로자가 스스로 마땅히 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근로자가 자기 아버지께 빌린 돈을 갚거나 용돈으로 드린 돈은 아무리 증빙을 해도 돌려주지 않을 뿐더러 혹시 그런 주장을 하는 아들이 있다면 주위에서 조롱만 당할 것입니다.(실제로 불신자 중 헌금의 소득공제에 대해 이런 조롱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무엇이며, 각종 헌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갚아)드린 것이고, 우리 교회(집안)에서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국가도 이미 이것을 존중하여 헌금 중에서 사례를 받는 전문종교인(사제)에게는 세금을 물리지 않습니다.
  반복하지만 헌금과 기부금은 다릅니다. ‘그게 그것이다’라고 묻어버리려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신앙적으로는 우리 삶에서 이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먹고 쓰는 것이 적잖은데도 세금실적이 없었으므로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시비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마태복음 22장) 예수님은 세금 내는 기준화폐의 도안을 누구의 것이냐 물으시고는 가이사 - 로마의 황제 시이저로서 세상권력의 상징표시- 의 것을 가이사에게로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분별해주셨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든 헌금봉투를 보시면서 ‘ㅇ ㅇ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고, ‘ㅇ ㅇ 기부금’은 기부단체에 내라고 하시는 셈이지요.
  그리고 헌금은 헌금의 고유한 종교적 맥락에서 사용되어야 100%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국가는 보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전용한다면 -- 예컨대 건축비로 사용되는 것은 -- 헌금(종교기부금)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역자들은 이런 맥락에서 세금감면을 받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노동의 대가로 받는 급료로 인정하여 거기에 세금을 물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사족을 붙이면, 연말정산에서 십일조(한 예로)를 내었으니 -- 따라서 내가 종교행사를 통해 사회봉사(기부금 제공)를 했으니 그 대가로 -- 세금 일부를 감면해 달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난 뒤 가이사에게 가서 자기가 낸 세금을 돌려달라고 (세상을 향해 나팔을 불면서) 요구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제 이런 측면을 고려하여, 연말정산을 통한 헌금의 세제혜택(헌금을 기부금으로 바꾸는 일)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비록 이것이 당장은 당사자에게 손해되는 느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교회의 선배 중직자들이 ‘주는 걸 왜 안 받아?’하는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장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기독교회의 교인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주는 것이라고 다 받아 챙기는 미숙함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말하듯이, 각종 헌금이 정산되고 난 다음 돌려받는 액수란 실제로 그리 크지도 않습니다. 헌금뿐 아니라 오히려 이제 더 많은 기부금을 내어 세상을 바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회에도 얼굴 없는 -무기명의- 기부자들이 얼마나 고액을 내면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까. ‘하려면 이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는 거지요.

대안으로
  마음을 졸이는 분들, 특히 “낮은 소득을 가진 분들이 교회헌금으로 세금공제 좀 받겠다는데 왜 이렇게 냉정하게 따지는거요?” 하시는 분들을 위해 작은 대안을 제시해 볼까 합니다. 저는 많은 헌금의 종류로 교인들을 부담스럽게 하는 제도를 근본적으로 반대합니다만, 한 가지 대안은 헌금과 회비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각종 헌금은 그대로 무기명으로 드리되, 위원회의 목적헌금을 회비제로 돌리면 어떨까 합니다. 부담이 된다면 헌금은 좀 줄이고 회비는 늘이면 될 테니까요.
예를 들어, 몇 주 전에 우리 교회에서는 장학, 선교헌금 작정을 하였습니다. 제게 이건 부담스런 일이지요. 어쨌든 저는 장학, 선교 헌신예배에서는 ‘헌금’을 할 것입니다. 만약에 장학위원회가 회원을 모집하여 회비를 걷는다면, 위원회의 담당자가 미납사실을 통보도 할 수 있고 또 내라고 요구도 당당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따로 관리하여 연말정산에 반영하는 것이죠. 내는 사람이나 낼 사람은 그 내역을 피차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위원회의 재정은 헌금 부분과 회비 부분으로 나누어 관리 운용한다면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치면서
  간단한 헌금봉투 기재로 출발하여 봉헌과 기부가 구별된다는 복잡한 이야기까지 산만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저의 생각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면 헌금의 의미가 본래적으로 거룩해지고, 이 일이 세상까지 전파되어 물질이 쓰이는 곳에 투명성과 합리성이 회복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제 생각을 뜬금없이 말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논리상 억척과 표현상 거칠음이 표출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제 얘기 자체를 진리로 믿으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고, 또 그러실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말에 다 동의하실 수도 없을 테고요. 다만 제가 드리는 말씀의 의도만 집어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통해 헌금이라는 작은 의식 하나가 그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신앙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하는 것이 제 글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탐구하여 적용하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앙생활의 그 어떤 자락이라도 생각하면서 실천하는 계기가 되셨다면 저로서는 무척 큰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교회의 의식과 제도들이 더욱 성경으로 접근해가지 않겠습니까?. 지면상 간단히(?) 끝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저물어 가는 한 해의 오후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여러분들의 송구영신 예배에 성령의 감동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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