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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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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야기2
작성자 신상형 작성일 2006-12-19 15:33:38
헌금봉투 이야기(계속)

들어가기에 앞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배움이’님께서 지난 헌금이야기1에 대한 응답을 주셨습니다. 원래는 <답글>을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교회 홈페이지에 앞 글을 올리는 방법을 잘 몰라서 이 글로 대신합니다. 이 기회에 <답글>에 대한 형식을 말씀드리면, 지금처럼 연속되는 주제는 바로 그 다음 회차의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라는 난에서 언급을 하고, 일회성 주제는 답글을 달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논쟁이 되는 주제는 제목에 표시를 함으로써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끌어가겠습니다.
        “헌금이야기”를 애초에 2회 정도 쓰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3회 정도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우선, ‘배움이’님의 글을 보면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세심하게 짚으면서 사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그 애쓰시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님의 글 내용은 제가 이야기 하려는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앞으로의 이야기 속에서 그 속 깊으신 궁금증이 잘 해소되었으면 합니다 (오히려 원래 님께서 취하신 태도를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단, 저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리의 전문가와는 거리가 먼, 같이 고민하는 ’동료 교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여기 말하는 것은 개인적인 견해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열린 자세로 대화를 통해 <보다 나은> 신앙생활을 이루어 가도록 서로가 노력하자는 것이 글의 취지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모든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지되리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들어가서
헌금봉투를 철저히 적는 이유는 많은 분들이 은연중에 그렇게 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더 ‘신앙적인’ 방법이라고 교육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교회는 담임목사님이 헌금봉투의 꼼꼼한 기재를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점수화하여 신앙생활의 성실도를 점검하거나 교회의 직분자 선임의 기준으로 삼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부교회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담임목사님은 헌금의 강요는커녕 너무 헌금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헌금설교를 간간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는 지경입니다(이 말에 오해마시기를!) 따라서 우리 교회 교인들의 경우 헌금봉투의 기재는 이전부터의 관행이거나 부모님으로부터 교육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봉투의 기재가 더 분명할수록, 다시 말해 더 정확할수록 덜 신앙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관행이든 부모교육에 의해서든 간에 이런 헌금내용의 공개(기재)교육은 대체로 ‘구약적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헌금 태도를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계율은 기계적으로만 이해될 때 징벌과 기복의 이원성을 띠는 딜레마입니다. 즉, 헌금에 대해서 말하면, 이 형식을 지키면 안전하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징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면 십일조 봉투에 인용된 말라기의 말씀처럼 복을 받지만 (“.....축복을 주나 주지 않나 시험해보라”는 표현까지 등장시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가로챘으니 사기꾼이 되므로 벌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철저하게 적고 확인해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간간이 ‘십일조를 잘 낸 아무개 장로의 집안이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도 양념으로 끼어들어 이 이야기의 분위기를 띄우기도 합니다.
        이런 형식주의적 헌금행위는 현실의 필요를 만나면 곧잘 타락의 길을 걷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중세의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해 모든 신자와 교회는 헌금의 액수와 납기일을 작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형식(교권)주의자들은 이것을 신앙의 (객관적) 수준으로 판단하면서 헌금하는 행위를 강요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경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개신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게도 많은 개신교회가 성전건축 - 교회당 신축인데도- 이라는 명목으로 이름을 기재하는 헌금을 강요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자는 말인 셈입니다. 더 나아가, 이에 대한 연장으로 모든 헌금을 형식적으로 세분하여 온갖 헌금봉투를 만들어 냈습니다. 뭔가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헌금봉투 적는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21, 2년 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교회 원로목사님(당시는 담임목사님)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목사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목사님, 헌금을 익명으로 드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라마 좋지만, 지금까지 해 온 걸 우짜노?” “목사님, 그게 성경적입니까?” “장로들이 무명으로 하마, 액수가 팍 준다 안 카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제.” “목사님, 서울에는 헌금함에만 넣고 무명 헌금하는 교회에서 헌금액수가 줄지 않는다는 데요. 믿음으로 하면 됩니다.” “그래, 신 집사야, 내가 믿음이 작은 기라. 미안하데이.......” 저는 원로 목사님을 폄하하려고 쓴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분같이 성경을 사랑하고 진리대로 살려고 했던 어른도 헌금의 관행을 깨뜨리기에 역부족이었음을 말씀드리려고 이 대화를 들이대었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저런 솔직함 때문에 저는 그분을 너무나도 존경합니다.
        그렇다면 헌금 봉투 어떻게 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봉투겉봉에 액수만 정확히 쓰고 나머지 부분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왜냐고요? 그러면 내는 분이나 정리하는 분이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머지는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제 개인적으로 비약하자면, 봉투에 인적사항 전체를 기재하는 것은 인본주의이고 액수만 쓰는 것은 신본주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헌금의 형식을 강조하면 겉봉이 화려해지고 내용을 중시하면 내부가 풍성해집니다. 제가 헌금을 정리하면서 느끼는 (지나친?) 감정은, 이름 없이 두툼한 헌금을 드리는 분은 믿음이 굉장해 보이고, 이름 적힌 두툼한 봉투는 과시로 보입니다. 이름 없는 얇은 봉투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세리의 회개의 눈물 같고, 이름 적힌 얇은 봉투는 한 달란트 받은 게으른 종의 변명 같아 보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제 주장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특히 소득자들이 연말이면 닥치는 소득공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입장은 한 마디로, “헌금은 무명으로, 소득공제를 위한 증명은 (따라서) 할 필요가 없다.”입니다. 한 주 더 고민해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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